• 납부신청안내
  • 포인트 충전 및 납부안내
  • 콘텐츠 이용 안내
  • 한국문학세상
  • 고객센터
 
작성일 : 22-03-02 15:40
눈사람(동화)김주옥
 글쓴이 : 김주옥
조회 : 1,339  

눈사람

 

밤새 눈이 많이 내렸다.

외출을 하기 위해 아침 일찍 밖으로 나서는 진희의 눈에 보이는 세상이 온통 하얗다.

옆집의 지붕 위도 하얗고 앞집의 담장 위에도 떡가루 같은 흰 눈이 쌓여 포근하다.

어디를 보나 온통 하얀 나라이다. 걸어가는 땅 위에도 이미 앞서 걸어간 사람들의 발자국이 꽃무늬처럼 찍혀 있고, 그 발자국 밑이 얼음처럼 단단해진 곳도 있었다.

어서 빨리 가야지 하고 마음 바쁘게 재촉을 하며 추워서 빨개진 손을 호주머니에 넣으려는데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골목에 세워진 눈 쌓인 승용차 위에 누군가 엄마하고 적어 놓은 것이다.

엄마

모두가 밤새 쌓인 그대로 흔적 없이 깨끗한데 이렇게 글씨가 제법 선명하게 보이는 것은 진희보다 먼저 지나간 누군가의 손길이 닿았다는 걸 의미한다.

그 엄마라는 글씨를 보는 순간 온몸이 굳어짐을 느끼는 진희.

한순간 눈물이 핑 돌며 주춤해지는 걸음으로 승용차 위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누가 보기라도 할까 봐 눈물을 얼른 찍어내고 애써 태연한 표정을 하며 지나쳤다.

하지만 계속 맴도는 엄마라는 단어 때문에 이미 마음이 축축해진 진희는 누구였을까? 하고 글씨의 주인공에 대해 상상을 해본다.

아마도 엄마가 그리운 중학생 언니인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해보다가 그렇게 큰 글씨를 쓴 사람이라면 어른일 수도 있다고 생각을 바꾼다.

엄마, 엄마, 엄마......

세상에 태어나 한 번도 얼굴을 본 적 없는 엄마.

진희의 기억과 추억과 생활 속에는 엄마라는 단어가 개입된 적이 없다.

2학년이 다 되도록 불러본 적이 없는 엄마라는 단어가 눈 쌓인 아침에 가슴 속으로 파고 들어와 아프기까지 하다. 눈자위가 다시 뜨거워지며 서러운 마음에 입속으로 가만히 엄마라고 불러본다. 엄마!

누구도 말해주지 않는 그 존재.

가장 소중한 존재의 부재는 늘 진희의 마음 한쪽을 시리게 한다.

 

오늘은 아빠가 외국에서 오시는 날이다.

일 년 동안 해외로 떠돌고 다니다가 잠시 집으로 오는 아주 기쁜 날이다. 아빠가 오실 땐 언제나 맛있는 과일이나 과자, 작고 예쁜 가방 같은 걸 손에 들고 오신다. 진희는 그런 아빠에게 드릴 선물을 사기 위해 문구점으로 갔다. 문구점 아주머니는 가게 문을 아주 일찍 연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는 진희를 보시더니

우리 예쁜 진희 왔구나. 오늘은 무슨 일로 이렇게 일찍 나왔니?”

진희네 가정사나 마을의 모든 일들을 훤히 알고 있는 아주머니였다.

우리 아빠가 오늘 오시는데요. 선물을 사려고 왔어요.”

그래, 참 좋겠구나. 얼마나 좋을까.”

하시더니 따뜻한 우유에 코코아를 넣어 진희에게 내민다.

감사합니다.”하며 꽁꽁 언 두 손으로 받아 든다.

문구점 아주머니의 막둥이 아들과 진희 아빠와는 친구 사이이다.

원래 이렇게 자상한 성격은 아니었는데 진희에게 어떤 슬픈 일이 생기고 난 후 무척 친밀한 태도로 진희를 대한다. 코코아를 마시며 가게 안을 두리번거리며 선물을 찾는 진희의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적은 용돈을 모아 살 수 있는 선물이란 그리 많지 않았다. 양말과 작은 액자 그리고 고운 빛깔의 편지지를 골랐다.

아주머니, 이거 다 얼마예요?” 묻고는 계산을 하고 집으로 오는 길로 걸었다.

따끈한 코코아를 마신 덕분에 추운 줄도 몰랐다.

 

승용차 위의 엄마라는 글씨가 아까보다 더 선명하게 보였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앞집의 미란이가 생각이 났다. 미란은 진희보다 세 살 위였다. 늘 씩씩하고 왈가닥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명랑한 아이다. 천방지축 거침새 없이 자라는 미란이.

저 엄마라는 글씨를 그런 미란이가 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미친다. 미란이 부모는 이혼을 해서 지금은 아빠하고 새엄마랑 살고 있다. 남의 눈에 티 나지 않게 잘 하려고 하는 새엄마. 그러나 아무도 없는 조용한 시간이면 이따금 강아지를 만지며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그러다가 진희와 마주치면 먼지를 털고 일어나듯 생각을 벗어나 재잘거리는 미란.

엄마!

진희는 그 글씨 위에 손을 얹어 가만히 더듬어본다. 태어나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엄마의 얼굴. 그러나 엄마에 대해 묻지도 않고 할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사진조차도 없으니 기억에도 없고 왠지 질문을 하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를 감지한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제 방으로 들어간 진희는 편지지를 꺼내들고 연필로 편지를 쓴다.

 

사랑하는 아빠에게!

아빠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오늘 아빠가 오시는 날입니다.

너무나 기뻐서 추운 줄도 모르고 선물을 사러 나갔다가 방금 돌아와서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양말과 저의 사진을 넣을 액자를 사고 편지지도 샀습니다. 제가 보고 싶을 때 사진을 보세요. 이번 사진은 교실에서 담임선생님께서 찍어주신 거예요. 제가 이다음에 크면 더 좋은 선물을 사드리겠습니다. 아빠, 빨리 오세요. 우리 아빠 사랑해요.

 

하트도 그리고 웃음 표시 갈매기도 그려 넣고 스티커로 밀봉을 했다. 이런 모습을 보신 할머니는 진희가 아빠가 무척 보고 싶은가 보다고, 음식을 장만하시며 얼굴 가득 웃음이 번진다. 생각하면 가슴이 아픈 일이었다. 어린 진희를 핏덩이부터 키워왔으니 다 늙은 나이에 못할 일이기도 했다. 말 못할 사연이었다. 진희에게 말을 하면 상처를 입을까봐 이제껏 입을 다물고 키워온 것이다. 저 어린 것이 얼마나 엄마가 그리웠을까. 엄마가 그리워서 누가됐든 젊은 여자가 관심을 주고 잘 해주면 엄마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하곤 했다. 혼잣말로 엄마, 엄마하고 불러보기도 했다.

엄마라는 존재가 세상 모든 엄마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영향을 아이들에게 미치는 것이다. 그만큼 소중하고 대단한 존재인 엄마. 모든 엄마들이 그걸 깨닫는다면 진희의 엄마도 지금 진희 곁에 있었을 것이다.

진희 할머니는 어린 손녀에게 아침을 먹자고 부른다. 유난히 빵과 떡을 좋아하는 진희에게 밥과 빵을 같이 챙겨주는 배려도 잊지 않는다. 제 어미젖도 못 먹고 자라는 손녀를 생각해서 품에 꼭 안고 빈 젖을 물리곤 했었다. 그래서인지 성품이 착하고 모나지 않아 키우는데 별반 어려움은 없었다. 다만 잠을 잘 때 누가 안아준다거나 손을 대면 아주 심각할 정도로 뿌리치곤 한다. 우유를 먹고 자란 탓일까. 이럴 땐 할머니는 속상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진희에게 갈치 가시를 발라주며 칭찬을 했다.

우리 진희 참 대단하네. 이렇게 눈이 푹푹 쌓여 추운데도 일찍 일어나 아빠 선물을 사오고......”

아빠가 오시면 기뻐하시는 모습이 보고 싶어서요.”

그래, 네 아빠는 진희만 보면 밥을 안 먹어도 배부르겠다. 그치?”

할머니 어깨에 잠시 머리를 기대고는 미소 짓는다.

할머니, 저 빨리 자라고 싶어요.”

왜 빨리 크고 싶은데?”

그러면, ...... 다음에 알려줄게.”

뒷말을 얼버무리며 다시 숟가락에 밥을 퍼서 담는다. 하고 싶은 말이 무언지 할머니는 짐작을 하면서도 차마 그 말만은 입에서 떨어지지 않아 그만 둔다. 좀 더 크면 말해주리라.

 

진희엄마는 진희를 낳고 열흘 만에 집을 나갔다. 그것도 꼭두새벽에 사라진 것이다. 초저녁부터 좀 이상한 낌새가 있긴 했지만 감히 그런 일이 생기리라고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임신을 하고 조울증이 심해져 친정으로 데려다 준 적도 있는 며느리였다. 만난 처음부터 뭔가 자꾸 이상한 행동을 하던 며느리 신정애. 남자 양말을 짝도 안 맞게 신는다거나, 아주 명랑해지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예 입을 다물고 말을 전혀 안 하거나 했다. 파혼을 하러 아들이 정애네 집에 가면 그 집에 꼭 무슨 일이 생기곤 하여 말도 못하고 돌아온 아들 준이. 그러하길 세 번. 결국 운명의 손에 이끌려 결혼까지 하게 됐다.

165센티미터 이상의 키에 외모는 그만하면 괜찮았고 성품도 온유한 편이었다. 다만 돌이켜서 기억해보면 그 조울증이란 병이 문제였던 것을 모두가 눈에 뭔가 씌어 바로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 병을 앓은 지 꽤나 오래된 모양인데 정애네 집에선 그걸 숨기고 혼인을 성사시킨 것이다. 중매쟁이가 남이 아니어서 그냥 믿고 끌려간 일이었다. 집안의 며느리가 본인은 본 적이 없어 아무 것도 모르는 채 정애 엄마와는 가까웠던 사이라 선을 보게 했었다.

진희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준이까지도 정애 어머니나 아버지를 좋은 사람으로 보았던 것이 문제였다. 어머니가 좋으면 딸도 좋은 법이라고 믿고 있었던 준이다.

 

오후쯤 되니 준이가 문을 열고 들어선다. 하루 종일 대문을 열어두고 아들을 기다렸던 진희할머니는 달려나가 짐을 받으며 함박 같은 웃음을 쏟어낸다.

어머니, 저 왔어요. 그동안 수고 많으셨지요.”

하며 들어와 절 받으시라며 어머니를 방석 위에 앉혀드린다.

넙죽 절을 올리고 곁에 있는 진희를 힘껏 안아준다. 진희는 종종 걸음으로 선물을 들고 나와 아빠에게 건넨다. 준이는 기특하다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볼에 뽀뽀를 해주었다.

보따리와 가방을 열어 그림책과 분홍드레스를 입은 인형을 보여준다. 울긋불긋한 사탕이며 젤리며 과자 그리고 커피와 코코아도 한 통 내놓는다. 아빠의 커다란 가방 속은 진희에겐 미지의 세계였다. 각국에서 사온 엽서에는 로렐라이의 성도 있고 인어공주도 있다. 영국 신사도 있고 디즈니랜드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도 있다. 꿈속의 것들이 현실로 귀환을 하는 순간이다. 신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진희의 모습을 보며 어서 엄마를 찾아주어야지, 하고 깊은 숨을 내쉰다. 그런 아들의 기분을 눈치를 챈 어머니 한씨는 말없이 앉아 짐들을 살펴본다. 작은 케이스가 눈에 띄었다. 반지인 모양이었다. 준이는 그 낌새를 알아차리고 작은 소리로 말을 한다.

진희엄마 찾으면 주려고요. 근데, 언제나 찾게 될지......”

때가 되면 오겠지. 살아있다면 말이다.” 한씨는 얼굴빛이 어두워진다.

정말 살아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벌써 몇 해가 흘러갔는가. 이토록 무심한 어미가 또 어디에 있겠나싶다. 어쩌면 반은 포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준이나 한씨 모두가.

기다리는 사람의 마음은 아랑곳도 하지 않은 채 어린핏덩이가 자라서 벌써 이학년이 되지 않았는가. 진희가 먹구름 속의 햇빛처럼 기다리고 있을 텐데, 자라면 상처가 더 깊어질 지도 모를 일인데 강물 위에 던진 돌덩이처럼 흔적조차 없는 정애를 어딜 가야 찾을 수 있을까.

길고 긴 세월동안 눈물없이는 지낼 수가 없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를 바라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에 속이 타서 까맣게 재가 될 지경이었다. 그동안 온갖 노력을 다하고 찾아 헤매었지만 지상에 없는 사람처럼 감감 무소식이었다.

아직도 진희엄마의 물건이나 장롱 그리고 옷가지들을 그대로 둔 채 귀향의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어떤 모습으로든 살아만 온다면 아무것도 묻지 않고 받아들일 결심이었다. 진희에게는 그 누구도 대신 할 수 없는 사람이 아닌가. 엄마라는 이름은 누구도 채워주지 못할 그리움의 대명사이기에 오직 하나 진희의 행복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진희가 세상에 나왔으니 분명 엄마는 존재하지만 한 번도 보지 못한 겨울 눈사람이었다. 해 뜨면 사라지고 녹아 보이지 않는 하얀 기억속의 그리움.

부르고 싶어도 부를 수 없는 이름. 새엄마라도 불러보고 싶었던 진희였다. 그러나 진희 아빠는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일을 하고 세월은 제 맘대로 흐르고 있었다. 그래도 세상에 오직 하나 피붙이인 진희가 있으니 그래도 위로가 되었던 것이다. 신혼의 단꿈도 젖어보지 못 한 채 답 없는 시간에 순응하며 팔자라고 체념을 하기도 했다. 선택은 자신이 했으니 누굴 원망할 마음도 없었다. 선택이 운명이 되고 책임도 되는 것 아닌가. 생각하면 슬프기도 했다. 곱게 키워 근심없이 자라게 하고 싶은 진희를 눈 앞에 두고 바라보면 자신이 그 병을 치유시키지 않은 책임도 있다고 자책하기도 한다. 병의 이름조차도 그때는 생소했으니 어찌할 것인가.

 

늦은 밤이었다. 할머니와 준이가 오순도순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문구점 아주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중요한 이야기이니 내일 아침에 가게로 와달라는 말을 한다. 궁금했지만 꾹 참고 잠을 청했다. 일찍 잠이 든 진희의 얼굴에 살구빛 미소가 어렸다. 꿈속에서 아마도 엄마를 만난 것일까. 진희의 손에는 갈색의 벨벳 반지케이스가 쥐어져 있었다. /

 

이 댓글을 twitter로 보내기
페이스북

등록된 의견이 없습니다

 
   
 

3,967
45351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