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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1-10-15 16:37
최치원(1), 천하에 문명을 떨치다!
 글쓴이 : 이형근
조회 : 10,903  
2. 12세의 최치원은 청운의 꿈을 품고 세계제국 당나라로 유학을 간다. “10년 안에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니 힘써 공부하라”는 부친의 격려를 받으면서 이국만리로 떠나는 배에 몸을 실었다. 신라판 조기 유학을 간 셈인데, 당나라는 당시의 글로벌 최강국이며 또한 세계의 중심 국가였으므로 이 시대로 친다면 글로벌 최강의 나라 미국에 유학을 갔다고 보면 된다. 최치원은 부친의 기대에 부응하여 유학 6년만인 18세의 나이에 글로벌 인재 등용을 위한 당나라의 외국인 과거시험인 ‘빈공과(賓貢科)’에 단 한 번에 장원 급제하였다. 이는 극히 이례적인 일로써 최치원의 천재성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당나라의 한 시인이 “열두살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十二乘船渡海來:십이승선도해래)/문장으로 중국을 감동시켰네(文章感動中華國:문장감동중화국)/열어덟 살에 글 싸움하는 과거에 나아가(十八橫行戰詞苑:십팔횡행전사원)/화살 한 대로 금문책을 깨었네!(一箭射破金門策:일전사파금문책)”라는 시를 지어 칭송해 마지않았다. 최치원의 부친은 똑똑한 자신의 아들이 당나라의 과거시험인 빈공과에 급제하기를 원했다. 그의 부친은 아들에게 자신뿐만 아니라 집안 전체의 명운을 걸었다. ‘삼국사기-최치원 열전’은 “최치원은 경주 사량부 사람이다.역사 기록에 전하는 것이 없어 그 세계(世係)는 알 수 없다.”고 전하고 있다. 그의세계, 즉 조상을 알 수 없다는 건 그의 가문이 신라 하대의 지배계층이었던 진골이 아니었음을 뜻한다. 최치원은 진골출신이 아니었으므로 골품제 사회인 신라에서는 제아무리 똑똑하여 날고 기어도 높은 관직에 올라갈 수가 없었다. 누구보다도 그걸 잘 알고 있었던 그의 부친이었기에 폐쇄적인 신라보다는 외국인도 등용할 정도로 개방적인 당나라로 유학을 보내기로 했던 것이다. 최치원의 당나라에서의 빛나는 행적을 보면 부친의 선택은 적중했다. 당나라의 과거시험에 급제한 후에 몇몇 관직을 거치다가 879년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반란군 토벌사령부의 종사관으로 스카우트되었다. 이때 최치원은 그 유명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쓰게 되는데, 이 격문을 읽던 황소가 간담이 서늘해져 자기도 모르게 의자에서 굴러 떨어졌다는 일화가 회자되면서 최치원의 문명은 중국 천하에 떨쳤다. 그 격문은 공격과 회유를 적절히 배합한 명문으로 평가되어 수많은 필사본이 당나라 전국에 떠돌았다고 한다.최치원은 토벌군사령부에서 종사관으로 근무한 공을 인정받아 승진을 하면서 황제로부터 비은어대(紕銀魚袋)와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황제에게 인정받은 최치원은 당에서 출세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춘 셈이었다. 당나라에서 출세할 기회를 잡았으나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견딜 수 없었으며, 더욱이 금의환향하여 중국에서 배운 학문과 경험을 살려 진충보국코자 하는 의욕에 가득찼다. 귀국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당나라 황제는 그에게 큰 혜택을 주었다. ‘최치원 열전’에는 “나이 28세에 이르러 귀국할 뜻을 비치자황제는 이를 알고 조칙을 지닌 사신으로 신라에 보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당나라의 사신 자격으로 귀국하게 했던 것이다.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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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견 2
 
 나의상태^^! '최치원(1),천하에 문명을 떨치다!&… 이형근 2011-10-15 16:42      
'최치원(1),천하에 문명을 떨치다!' 한꺼번에 다 올려지지(입력)않아서 두 번 나누어서 올렸습니다.
관리자님께서 보시거든 좀 긴 글도-종전처럼- 한번에 올릴 수 있도록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나의상태^^! 문학성과 역사성을 두루 간직하고 있… 정문택 2011-10-17 22:50      
문학성과 역사성을 두루 간직하고 있는 미문이군요, 
알찬 내용으로 전개되는 글 - 후편을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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