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가시밭길을 꽃길로 [2024 봄여름호]
(수필가 남도국) 일제의 압정이 최고조에 달하던 1937년 음력 4월 26일 오후 2시, 강원도 남단 울진의 한 작은 마을에 반가워도 않는 한 남자아이가 태어났으니 이는 여섯 아들 중 막내라. 논 약 여남은 마지기 경작하는 가난한 농부의 여섯째로 태어났으니 사랑이란 무엇인지도 모르고 늘 배가 고파 울며 성장하였다. 소년으로 자라서는 소 꼴 베러 들로, 나무하러 태백산으로 가고 오고, 또 다른 날이면 잡다한 농촌 일로 쉴 날 없이 고된 일만 하며 살아온 한 소년의 이야기다.피땀 흘러 쌀이나 양식이 될 만한 곡식을 수확해 놓으면 일본 정부가 전쟁 지원한다며 죄다 공출해 가 농촌 농민은 보릿고개 기간에 초근목피 죽으로 연명해 왔다.1945년 해방 전 해, 어렵사리 월사금을 내고 초등학교를 입학했으나 일본인이 운영하는 학교라 일본식 교육을 강제로 배울 수밖에 없었다. 다음 해 일본으로부터 조국이 해방되고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지고 아직 자리를 뿌리내리지 못한 혼란기에 소년은 일본어도 한글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채 초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소년의 가시밭길 걸음은 후에도 이어져, 남한 땅에 정부가 들어서고 사회 질서가 어수선하든 1950년 3월 힘들게 긁어모은 돈으로 중학교에 어렵사리 입학하게 된다. 중학교 입학의 기쁨을 채 누리지도 못한 그해 6월 25일 새벽, 탱크로 중무장한 북한군이 선전포고도 없이 남한의 3.8선을 침범해 왔다. 아무 준비도 없던 남한 정부와 군대는 손도 쓰질 못하고 북의 침략에 밀려 남쪽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나이 열넷 소년은, 어려서 군에도 못 가고 집에 남아 있는데 북의 인민군대가 집을 점령하고 자기들을 따르라 했다. 죽기는 싫어 그들이 시키는 인민학교에 매일 출석하여 인민군 노래와 북한의 헌법을 배우고 김일성 숭배 방법을 배우고 따르든 석 달 후, 유엔군의 지원으로 조국이 다시 탈환되고 정부가 서울로 귀환하여 자리를 잡게 되자, 남과 북이 미국과 소련의 합의에 따라 휴전이 이루어지므로 어린 소년은 겨우 목숨은 건졌으나 제대로 된 교과서를 배우지 못하고 중학교 3년을 아무 쥔 것 없이 졸업하게 되었다.1955년, 열일곱 어린 나이의 소년은 보따리 짐을 꾸려 도시로 살길을 찾아 나섰다. 전쟁 직후라 도시에 나갔으나 누구 하나 반갑게 맞아 주거나 도와주는 이 없고 모두 들 자기 살기에만 급급하던 시절, 그래도 소년은 청운의 꿈을 꾸며 돈 안 드는 군산 시립도서관을 찾아 이런저런 책을 뒤집고 펼쳐 보며 2년 반의 세월을 지났으나 빈손뿐으로 갈 길을 찾던 중 차라리 안전하고 환영받는 군에 입대하기로 지원하였다.1959년 3월, 논산훈련소 26연대, 시골에서 고달픔을 체험한 소년은 훈련소의 고된 훈련쯤은 아무 어려움 없었다. 훈련소에서 시키는 대로 잘 따라 하니 어려운 일 없이 전 후반 6주 교육을 잘 마치고 발령을 기다리는데, 호기심 많은 청년의 운명을 가름할 미군 부대(카투사)로 발령이 떨어진다. 부평 보충대에서 일주일 지내고 최종 근무지 경기도 동두천에 있는 미 육군 제7보병 사단 항공대에 발령받아 안착한다.지급되는 군복들이 어마어마 고급스럽고 멋지다. 침실도 주위 환경도 가난한 우리나라 군에 비하면 너무도 고급스럽고 황홀하다. 그러나 식당에서 제공되는 양식은 냄새조차 맡기 싫어 죽을 지경이다, 식당 부근에만 가도 냄새가 진동하고 구역질이 난다. 그래도 살아야 하니까 가고 또 가고 참고 이기고 두 주가 지나니 좀 적응이 되고 먹으면 소화를 이루어 내는 멋진 군대로 자리하게 된다.주어진 일이 재미도 있고 흥미도 있어 열심히 따라 한다. 태어나 처음 미군 장교가 조종하는 T-19 헬리콥터에 탑승하고 전선 지역을 살피고 순찰하는 일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동료들은 주말이면 외박을 나가지만 여건이 허락하지 않는 카투사 사병은 집이 먼 시골이라 외출은 꿈도 꾸질 못하고 주야로 미군들과 함께 먹고 자고 놀고를 한다. 여섯 달 후, 일 잘하고 실용 영어에 익숙하다며 대대본부 서무계로 불러 앉힌다. 영문은 물론 공병우 한글 타자도 익혀 한글을 영어로 영어를 한글로 문서를 작성하여 제출하면 주저 없이 결제가 이루어진다, 일반 하사로 진급되고 제대 6개월 남기고 1961년 3월 부산 적기에 있는 육군 군수기지 사령부로 전보 발령받는다. 얄궂은 가시밭길 운명은 다시 시작되었다. 그해 5월 16일, 군사혁명이 발생했다. 주동자가 하사가 소속한 부대 사령관 김용순 준장이다. 전국에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군대가 사회 질서를 지키는 때가 되었다. 하사는 부산지역 국가 비상 통제 사무실 담당자로 바쁘게 일했다. 9월 제대 계획이 2개월 연기되어 11월 말까지 군사혁명 업무를 마치고 30개월 군 복무를 무사히 끝내고 전역할 수 있었다. 1961년 11월 제대 후, 미 공군 군산 비행장에서 군견 대원 모집이 있단 소식을 들었다. 망설이지 않고 응시한 결과 전에 없이 필기시험으로 치열한 경쟁을 뚫고 합격하게 된다. 전쟁 직후라 미군에서 신원 조회를 철저히 하는 통에 일 년을 기다렸다. 1963년 3월 드디어 군산 미 공군 비행장 헌병대 소속 군견 대원으로 채용되어 45구경 권총을 허리에 차고 잘 훈련된 독일산 셰퍼드 군견 한 마리를 끌고 활주로 끝자락을 밤이 새도록 지키고 감시하는 일을 2년 동안 했다. 카투사에서 익힌 실용 영어가 좀 돋보였는지 헌병대 체크포인트 경비원으로 불러 앉힌다. 당시 비행장을 출입하는 모든 사람은 체크포인를 통해 출입증을 받아 들어가고 퇴근 시는 반납하고 나간다. 방문객 안내도 절차와 지시에 따라 철저히 진행한다. 여기서도 일 잘한다는 인증을 받아 1969년 사령부 안전처 안전관에 응시한 결과 합격의 기쁨을 맛보게 된다, 군견 대원 5급으로 시작하여 7년 만에 9급 자리에 올라가고 한국인 직원 유일하게 관리직에 앉아 주요 미군 참모 회의에 참석하고 부대의 3급 비밀 업무를 접하며 일하게 된다.다른 직원에 비교하거나 한국 공무원이나 기업체에 비교하면 월등히 급료가 높고 잘 나가는 듯하지만 관리 능력 부실로 젊은이는 땡 돈 한 푼 저축하질 못하고 세상의 유혹에 휘말려 죄짓고 방황하던 청년이 안타까웠는지 형수님이 경영하는 미용실에 얌전하고 예쁜 미용사 이야기를 자랑삼아 전해 준다. 남 주기 아깝다며 소개해 주어 만났는데, 그 모습이 첫눈에 그리 아름답고 예뻐 반하고 말았다. 그 사실을 어른들께 여쭙고 이듬해인 1965년 가을에 혼인 식을 올리고 신혼여행도 가질 않고 결혼식 그날 신랑은 야간 근무 일하고, 신부는 손님을 맞이하여 오후 시간 내내 바쁘게 일했다. 형수님의 미장원을 인수하여 열심히 정신 차리고 모으니 월급은 생활비로 부인이 번 돈은 죄다 은행에 저축하여 재물이 금방 불어났다. 미장원을 그만둔 형수씨는 근방에 다방업을 차리고 손님을 불러들여 미제 모닝커피 다방으로 소문나 손님들이 많이 몰려든다. 꿈 많은 청년은 비행장 안전관 외 다른 부업으로 한국의 해외개발공사 전북지사를 아내가 운영하는 미장원과 형수님의 다방 근처에 개설하고 한국 아가씨들의 국제결혼 수속을 도와 해외로 결혼시켜 이주 보내면서 돈을 많이 벌었다. 당시 군산의 유명 신문에서 신흥 부자 탄생이라는 기사를 대서특필로 보도하여 지역에서 자타가 인증하는 장래 부자 젊은이로 인기를 한 몸에 받으며 지냈다. 돈은 잘 벌리는데 10년 동안 그 자리에서 딸만 넷을 낳아서 아이가 여덟 살, 여섯, 네 살, 두 살이 되니 미군들이 우글거리는 영화동은 자녀 키우기에 안 좋다는 느낌이 들었다. 영업이 잘되는 미용업과 해외개발공사를 접고 조용하고 분위기 좋은 삼학동 변두리 이층집으로 이사하여 이층은 월세 놓고 월급 수입이 튼튼하니 아이들 키우면서도 살만했다. 이사 간 지 7개월 만에 아들을 낳으니 인생 40에 최고의 성공을 거두는 날로 기록됐다. 당시 한국에는 대학이나 기업체에 안전 문제를 전담하는 부서나 전문인이 없었다. 사고가 발생하면 해당자 스스로나 회사가 재수가 없어서 그런 일이 일어난 걸로 믿고 적당히 처리하며 지나치기 일쑤였다. 그러나 미 공군에서는 안전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철칙으로 실천하기 때문에 그러한 값진 메뉴얼을 배우고 터득하고 가르쳐야 할 자리에 있는 안전관을 미국 정부에서 예산을 들여 미국 본토의 안전교육기관이나 안전학교에 여러 차례 보내고 배우게 하여 우리가 잘 알지 못하던 분야의 일인자가 된다. 그러자 교통부와 치안본부 기업체 등에서 미국서 받은 안전전문교육에 대해 강의 요청이 쇄도했다. 시청각 교육 프로그램으로 강의하면 내용에 깊이 공감하며 모 회사에서 안전관으로 스카우트 요청을 해 왔으나 급료 차이가 많은 이유로 거절하며 미군 부대를 지켰다. 부대에서는 매년 말이면 일 잘하고 모범적인 군 장병과 민간인 직원을 선정하여 표창하는 제도가 있었는데 1,500여 한인 직원 중 유일하게 최우수직원 상을 20년 동안 18번을 수상하는 모범 직원 자리를 고수하기도 하였다.1987년, 사령부 공보관 자리가 생겨나 그 자리에 응모하라는 요청이 왔으나 안전관은 신경 덜 쓰고 편안한 자리를 고수하려 응모하지 않았다. 내로라하는 다른 직원들이 응시하여 면접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발표가 미뤄지고 있다며 인사처에서 전화가 왔다. 사령관이 필자에게 공보관 자리에 응시할 생각이 없느냐고 물어보라 했다고 한다. 9급에서 11급, 유사시엔 주말에나 언제든 부르면 일터로 나가야 하는 직책, 한인 직원 중 가장 높은 자리, 미 국방성 소속으로 현직 대령 대우받는 자리를 그렇게까지 마다할 이유가 없을 것 같아 부족하나 조심스럽게 신청해 보겠다고 전했더니 그다음 날 사령관이 인터뷰도 하지 않고 공보관 자리에 불러 앉혔다.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군대는 주둔 지역 주민들과 지도자들 간의 우호와 협조가 전쟁 못지않게 중요하다. 미군 사령관은 부임 1년이면 본국으로 돌아가지만, 보좌관 임무를 수행하는 공보관은 일 년 내내 사령관 뜻을 받들고 보좌하고 성공하도록 만들기 위해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한결같이 수행해야 한다. 지휘관은 전투 능력도 뛰어나고 사병들과의 소통과 신뢰 협조도 중요하며 지역 주민이나 지도자들과 유대도 그에 못지않은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공보관이란 직책은 매일 매시간 몸과 정성을 다하여 사령관의 뜻을 받들고 보좌하기 위하여 충성을 다해야 한다. 시장님과 의회 의장, 군수, 경찰서장, 상공회의소 소장, 체육회장, 교육지원처, 한미친선협회와 검찰, 법원, 인근 군부대 장들, 지역의 저명인사 등 많은 주요 인사들과 긴밀한 관계를 통하여 사령관의 관심사를 연결 고리로 만들고 성공으로 가는 것이 통번역만 하던 과거의 통역관과는 업무 자체가 달라 머리가 아팠다.한국의 VIP는 약 3~400명, 시장 군수가 추천하는 인사 100여 명, 한미 친선 골프협회 회원 약 120명, 부대 사령관이 인증한 저명인사 80여 명의 출입증을 죄다 공보관이 발급하고 정리하고 삭제, 보관하는 일을 한다. 업자들은 군부대의 쓰레기도 좋다며 부대 경쟁적으로 입찰에 참여하여 부대 쓰레기를 싣고 나가 밖에서 되팔아 돈을 벌었던 시기라서 많은 사람이 미군 부대 출입증을 얻는 일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렵고 귀한 일이라 여겼다,그들은 이것만 손에 쥐면 밖에서 목에 힘을 주며 과시하는 이유가 되었으니, 그런 위험한 일을 다루는 공보관은 시민의 눈치와 의혹을 얼마나 많이 받으며 스트레스를 받았겠는가.그러나 그가 걸어온 길은 가시밭길만은 아니었다. “밤의 어둠이 짙으면 낮의 해는 더 밝게 비춘다”라는 속담처럼 1996년 4월, 군산비행장 한인 공보관은 국방성 미군의 날 행사에 초청되어 펜타곤 대회의장에서 “미 공군 최우수공보관 상”을 수상하였다. 미 공군은 세계에서 가장 강하고 크고 위협적인 조직체다. 세계 각처에서 미 공군이 세계의 민주주의와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목숨 걸고 땀 흘리며 헌신하고 살아가고 있는 현실은 삼척동자도 잘 알고 있다. 최우수공보관 상을 받게 된 것은 35년간 지구촌에서 가장 위협적인 북한의 도발에 맞서 능동적으로 일하며 땀 흘린 결과라 하였다. 축하의 뜻으로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 그 후 사흘간 미국 정부에서 제공한 VIP Tour를 받으며 백악관, 펜타곤 (참새도 못 들어간다는 곳) 4층 건물 전체,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를 포함하여 링컨 기념관, 한국전쟁 기념공원 등을 탐방했다. 그 후로도 일 년이 멀다 하고 미국 공군의 최고 전략기지인 알래스카 엘멘돌프 기지와 미국령 괌에 있는 엔들슨 기지, 오키나와 나하 기지 그리고 북해도의 미사와 기지를 특별기로 돌아보는 대접도 받았다. 2000년 6월 퇴직 후 몸에 이상 신호가 와서 경북의 한 조용한 시골에 이주하여 세상 모든 잡념을 버리고 이런저런 책을 읽고 쓰는 일에 전념하며 살았다. 3년쯤 후, 우연히 지방 신문사의 작품 공모전에 처음 처음 응모한 것이 입상하게 되었고, 이후 한국문학세상 신인상에 응모하여 당선의 기쁨을 얻어 수필가로 데뷔했다.한국문학세상은 문학인의 길을 열어준 곳이기도 하다. 열심히 작품을 쓰면서 계간지에 발표도 하면서 디지털 문학의 활성화에 작은 디딤돌이 되어 갔다. 그런 열정을 좋게 평가했는지 한국문학세상이 개최한 ‘2020 대한민국 최고스타 문예대상’에 당선되기도 했다. 2024년에는 수필집 ‘인생 2막’으로 ‘2024년 대한민국 베스트 작가상’에 당선되는 기쁨을 얻었다. 88세에 숨겨진 문학적 소질을 찾아낸 것이다. 남들이 걷지 않는 험한 길을 걸으며 지내 온 필자에게 축복이 내린 것이다. 젊은 시절에는 우연한 기회에 아름다운 반려자를 만나게 되어 인생의 가시밭길을 꽃길로 걸어가도록 전환 시켜 주었고 아들딸 다섯을 낳아 키우고 가르쳐 시집, 장가보내고 네 명의 사위와 며느리, 손자 손녀 등 24명의 가족이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진리의 길을 걸어가도록 인도해 주었다. 또한 느지막하게 한국기독교장로회 합동 측 장로로 세워 주신 것, 보통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골프 홀인원을 이루게 한 것, 구순을 바라보는 노인의 컴퓨터 자판이 오늘도 쉬지 않고 뚜벅뚜벅 쓰도록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